사단법인북한인권시민연합
북한인권실상
북한인권상황
탈북민 증언/수기
북한인권갤러리
북한인권개념 Q&A
UN보고서
뉴스룸
공지사항
보도자료
언론에 비친 NKHR
뉴스레터
연간활동보고서
조사보고서
학술·국제회의
생명과인권
영상뉴스
시민연합 활동
캠페인 프로그램
탈북난민 구출/ 정착지원
탈북청년 리더십 프로그램
북한인권 인식개선
NKHR 소개
인사말
정신과 사명
축하메세지
창립취지문
연혁
조직도
위치
참여하기
투명경영
후원안내/후원
후원내역
인턴·자원봉사 신청
KOR
ENG
KOR
후원하기
뉴스룸
공지사항
보도자료
언론에 비친 NKHR
뉴스레터
연간활동보고서
조사보고서
학술·국제회의
생명과인권
영상뉴스
2025-07-27 ‘북한 외교관과 맞짱’ 간 큰 탈북여성… ‘열한 살의 유서’ 저자 김은주 씨[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조회 317
‘북한 외교관과 맞짱’ 간 큰 탈북여성… ‘열한 살의 유서’ 저자 김은주 씨[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크게보기
역경을 딛고 한국에 도착해 통일부 북한인권증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은주 씨.
올해 5월 20일 미국 뉴욕 유엔 고위급 회의장. 김성 주유엔 북한 대사가 격앙된 소리로 말했다.
“북한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주권을 침탈하기 위해 소집된 이 회의를 강력히 규탄한다. 더 유감인 건 부모와 가족조차 내버린 쓰레기(scum) 같은 인간들을 증인으로 초청한 것이다.”
김 대사의 발언은 앞서 탈북민 김은주 씨가 제79차 유엔 총회 주최 북한 인권 고위급 전체회의에서 북한 정권의 인권 침해를 증언한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자기 할 말만 마치고 황급히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과 시종일관 굳은 얼굴로 서 있는 북한 참사의 모습을 보면서 은주 씨는 생각했다.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네. 미국에 와 있으면 북한의 실상을 너무 잘 알텐 데 저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인간들….’
다음날 은주 씨는 모 언론사 기자와 함께 뉴욕에 있는 북한 유엔 대표부를 찾아갔다. 북한 대표부는 보안도 제대로 되지 않는 싸구려 아파트 13층에 있었다. 허술한 문짝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유엔 대표부’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은주 씨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문을 두드렸다. 한 남자가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탈북자입니다.”
말이 끊기기도 전에 남자는 문을 쾅 닫았다.
은주 씨는 닫힌 문을 향해 준비해 간 편지를 읽었다.
“저는 여러분들도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실을 알면서 앞으로도 북한 정부를 계속 대표한다면, 여러분은 가해자가 될 것입니다.”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다 읽은 편지를 문 앞에 두고 내려왔다.
그때를 회상하며 은주 씨는 말했다.
“유엔 총회에선 시간과 상황의 제약 때문에 북한 대표부와 직접 이야기하지 못해 아쉬웠어요. 기회가 된다면 북한을 대표한다는 저들에게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하고 싶었어요. 나와 내 가족을 버린 것은 북한 당국입니다. 저는 부모와 가족조차 내버린 쓰레기가 아니라, 식량난에 북한 정권에 쓰레기처럼 버려진 아버지를 잃고 나머지 가족과 함께 목숨을 걸고 탈북해 새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요.”
김은주 씨가 올해 5월 유엔에서 북한 외교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북한 인권 실상을 증언하고 있다.
‘고난의 행군’을 만난 어린 운명
은주 씨의 고향은 아오지탄광이 있는 함경북도 은덕군이다. 오랫동안 경흥이라 불리다 김일성 은덕을 많이 받았다는 의미로 1977년 은덕군으로 개명했다.
1986년 8월 15일 ‘120(일이공)군수공장’ 노동자인 부친과 ‘613(육일삼)탄광’ 병원 직원 모친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언니는 두 살 위였다.
북한엔 이름에 숫자가 붙은 공장이나 기업소가 많다. 대개 김 씨 일가가 만들 것을 지시한 날짜 또는 현지 시찰한 날짜의 달과 날을 의미한다.
그의 아버지는 군 복무를 마친 뒤 ‘무리 제대’ 대상이 돼 은덕에 오게 됐다. 제대 군인들을 인력이 모자라는 지역에 수백 명씩 보내는 것을 무리 제대라고 한다. 어머니는 평양에서 만경대 인근 칠골중학교까지 졸업했지만, 평양 인구 축소 정책 때 부친(은주 씨의 외조부)이 쫓겨난 함북 청진으로 오게 됐다.
은덕을 받았다는 이름과 달리 은덕군은 북한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어서 은주 씨는 어려서부터 배고픔에 시달렸다. 다행히 모친이 병원 식당에서 일했기 때문에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 초기에 굶어 죽는 운명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병원도 식량을 받지 못하고 마비되기 시작했다. 1996년 인민학교 3학년이던 은주 씨는 대열을 맞춰 노래 부르며 하교하다가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며 주저앉았다. 겨우 열 살이었지만 그는 삶이 여기서 끊길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꼈다.
‘먹지 못해 빈혈을 느끼고 있다. 집은 가난하고 식량 사정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나는 먼저 죽은 친구들을 따라갈 수도 있다.’
그때부터 1999년 2월 18일 첫 번째 탈북을 할 때까지 3년간 기억은 전부 깜깜했다. 그는 생지옥을 목격했다.
산에 묘비 없는 무덤들이 즐비했다. 각목으로 세운 묘비는 며칠 뒤 사라졌다. 땔감으로 뽑아 간 것이다. 노인과 남자, 아이, 여성 순으로 죽어 갔다. 청진에 살던 외할아버지도 1997년에 굶어서 숨졌다. 공개 총살도 늘어났다. 처음으로 목격한 공개 처형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선생님 인솔 하에 7~11세밖에 안 되는 학생들이 단체로 처형장에 갔다. 총살된 사람은 옥수수 30kg를 훔치다가 사람을 죽인 남성이었다.
해가 갈수록 사정은 나빠졌다. 장마당에서 구걸하다 쓰러진 앙상한 시체들이 늘어났다. 파라티푸스, 장티푸스 같은 수인성 전염병이 창궐했다. 뼈밖에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 남은 몸속 수액을 내쏟으며 죽어 갔다. 그가 살던 아파트에서도 하루가 멀게 산 사람이 시신으로 변했다. 집을 팔아도 두부 한 모와 바꿀 수 없었다. 살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소나무 껍질만 먹다 풀독이 올라 죽은 이웃도, 독버섯인 줄 알면서도 먹고 죽은 이웃도 있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을 바엔 차라리 먹고 죽자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람 힘이 빠지니 아파트도 힘이 빠진 걸까. ‘속도전’ 날림식으로 지은 아파트 벽에 커다란 금이 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이 됐지만 이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김은주 씨가 2023년 한국을 방문한 미국 대학생들 앞에서 북한의 실상을 설명하며 미소 짓고 있다.
열한 살의 유서
1997년 11월 아버지가 굶어 죽었다. 영양실조에 걸린 뒤 늑막염 진단을 받은 뒤부터 아버지가 이상해졌다. 너무나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남들처럼 농장 밭에서 뭐든 훔쳐 오라고 해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늑막염 진단을 받게 됐다. 아무리 먹어도 성에 차지 않아 했고, 딸들 몫으로 남긴 죽까지 먹었다.
집에서 판자까지 뜯어 내 먹을 것과 바꾸기 시작했다. 딸 책가방을 들고 나가 먹을 것과 바꾼 며칠 후 아버지 눈빛이 바뀌었다. 죽음을 직감한 어머니가 겨우 죽을 만들어 떠먹였지만, 그 좋아하던 죽을 두세 숟가락밖에 삼키지 못했다. 다음날 누운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직장 동료들이 찾아와 판자로 관을 만들어 아버지를 묻었다. 그나마 공장에서 만들어 준 관에 묻힌 마지막 사람이었다. 며칠 뒤부턴 판자가 없어 그냥 가마니에 시신을 싸서 묻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다. 은주씨네 온 가족은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다. 은주 씨와 언니는 1997년 한 해 학교에 다니지 않고 온종일 먹을거리를 찾아 헤맸다. 토끼 배설물에 붙은 나물 쪼가리까지 골라 먹었다.
어머니가 언니를 데리고 나선시로 수백 리 길을 떠났다. 중국인들이 장사하려 드나든다는 나선에 먹을 것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떠나기 전 어머니는 그에게 북한 돈 15원을 주면서 “빠르면 하루, 늦으면 사흘 안에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 돈으론 두부 한 모를 살 수 있었다.
그 이튿날 은주 씨는 장마당에서 두부 한 모를 사 먹었다. 그 뒤론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올까 11세 은주는 매일 동네 어귀로 나갔다. 나흘이 지나도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떠난 뒤 엿새째 저녁 은주 씨는 집의 싸늘한 시멘트 바닥이 자신을 빨아들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일은 마중 나갈 수가 없구나. 내일 내가 죽는 날이구나.’ 어머니도 없이 혼자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몹시 서러웠다. 겨우 종이 쪼가리를 찾아 한 자 한 자 적었다. ‘엄마, 곧 죽을 것 같아요. 기다리지 못해 미안해. 용서해.’ 종이를 머리맡에 놓고 죽음을 기다렸다. 의식이 점점 흐릿해졌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인기척이 들렸다. 어머니와 언니가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딸의 유서를 본 어머니는 주저앉았다. “그래. 우리 죽어도 다 같이 죽자.” 셋은 누더기 같은 이불을 함께 덮고 나란히 누웠다.
김은주 씨가 2012년 펴낸 자서전 ‘열한 살의 유서’ 한국어판.
‘가족 꽃제비’
아침이 되자 창가에 스며든 햇볕이 느껴졌다. 아직 죽지 않았다. 갑자기 어머니가 무엇을 발견한 양 벌떡 일어났다. 벽에서는 ‘위대한 수령’과 ‘친애하는 지도자’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초상화 액자 유리는 팔아먹었지만 초상화만은 남아 있었다. 어머니는 수령과 지도자 사진을 사정없이 뽑아 불태워 버렸다. 금박 액자틀을 들고 밖으로 나가서는 약간의 먹을 것과 바꿔서 돌아왔다. 당장의 죽음은 면했지만, 그들은 집에서 살 수 없었다. 집에 그 초상화가 없다는 것은 죽음으로 씻어야 하는 정치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주 씨는 학교에 다닐 때 참관했던 어느 젊은 부부의 공개 총살형 장면을 떠올렸다. 6세, 8세 자녀를 둔 부부는 굶어 죽게 되자 마을에 있는 김 씨 일가 ‘말씀비’ 동판 글씨를 뜯어 내 팔려다 잡혔다. 처형이 끝난 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남은 애들은 곧 굶어 죽겠네. 정말 불쌍해.” 은주 씨는 이 수군거림을 들으며 ‘꼭 나쁜 사람만 처형되는 것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자신이 그런 운명에 처할 줄은 몰랐다.
어머니는 두 딸의 손을 잡고 집을 빠져나와 나선을 향해 떠났다. 그곳엔 바다가 있어 미역이라도 주워 먹자는 타산이었다. 살을 에는 북방의 찬바람을 견뎌내며 나선에 도착했다.
세 모녀의 처절한 생존 투쟁이 시작됐다. 아파트 계단, 다리 밑, 장마당, 역 앞이 이들의 잠자리였다. 겨울엔 산에 올라 땔감을 주워 장마당에 팔았고, 봄에는 산에 올라 풀뿌리를 캤다. 여름엔 농장 밭에서 감자나 고추를 훔치다가 몰매를 맞기도 했다.
나뭇짐을 지고 장마당에 나가던 어느 날, 마을 아이들이 은주 씨를 둘러싸고 “야, 여자 꽃제비가 왔다”고 놀리기 시작했다. 화가 났지만 곧 인정하고 말았다.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아, 나는 꽃제비구나.’
은주 씨처럼 가족이 몰려다니는 꽃제비는 ‘가족제비’라고도 불렸다. 그때를 생각하면 은주 씨는 늘 눈시울이 붉어진다.
“1년 넘게 짐승보다 못한 그 모진 삶을 살면서도 어머니는 저와 언니를 버리지 않았어요. 엄마가 없었다면 12세, 14세인 우리 자매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크게보기
김은주 씨는 파란만장한 삶을 헤쳐 왔지만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며 살려고 노력했다.
얼어붙은 물을 헤치며 탈북하다
1998년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시작됐다. 꽃제비에겐 가장 혹독한 계절이다. 어머니는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은덕은 두만강 하구에 있어 강폭이 넓었다. 멀리 중국 땅이 바라보이긴 했지만 건널 생각은 못했다. 강을 넘다 잡히면 총살된다고 세뇌를 당해 공포가 심했다.
그럼에도 꽃제비 생활 초기인 그해 3월 은주 씨 가족은 도강을 시도했다. 하지만 강 가운데가 녹아 얼음이 떠다녀서 실패했다. 어머니는 다음 겨울 얼음이 얼었을 때 다시 건너자고 했다. 강폭이 좁은 상류로 갈 수도 있었지만 여행증 없이 지역간 이동이 쉽지 않았고, 익숙한 곳을 통해 탈북하려는 생각이 강했다.
1999년 2월 18일. 세 모녀는 두만강을 넘었다. 그 전날 산에 올라 경비대가 어디에 잠복 근무를 서는지 살펴봤다. 오전 5시 어머니가 일어섰다. 얼어붙은 강에 올라서자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피부 속 깊이 파고들었다. 돌아설 수는 없었다. 한참을 달리다 갑자기 얼음이 꺼지며 물에 빠졌다. 죽는가 싶었는데 발이 땅에 닿았다. 중국 쪽 실개천이었다. 물 밖으로 나오니 순식간에 옷이 꽁꽁 얼어붙었다. 달리려 해도 얼어붙은 옷 때문에 무릎을 굽힐 수 없었다. 일자 다리를 겨우 움직여 산에 올라 불을 피워 옷을 말렸다. 하룻밤을 산에서 묵었다.
아침이 되자 산 아랫마을에 내려가 집 문을 두드렸다. 첫 번째 집 40대 부부는 세 사람 행색을 보곤 밥을 줄 테니 먹고 가라고 했다. 마침 음력설이 지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이밥과 계란, 태어나 처음 보는 건두부볶음을 먹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을 줄 상상도 못했다.
“그때만 해도 강폭이 넓은 훈춘 쪽으로 탈북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중국 쪽 인심이 괜찮았어요. 굶어 죽어 가는 북한 사람들을 동정했고요. 그런데 2년쯤 지나선 훈춘 사람들도 더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강을 넘어온 북한 사람들이 도둑질에 강도질도 한다는 소문이 퍼져 탈북민을 경계했거든요.”
크게보기
김은주 씨가 올해 한 북한 인권 행사장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중국에서 만난 천사와 악마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배불리 먹은 이들은 다시 산에 올라와 숨었다. 어둠이 내린 뒤 산에서 내려와 큰길을 따라 걸었다. 길을 따라가면 도시가 나올 것으로 생각했다. 한참을 가는데 뒤에서 자동차 불빛이 나타났다.
‘숨을까. 아니, 벌써 봤겠는데 소용없지 않을까.’
잠시 망설이던 찰나 자동차가 그들 옆에 잠깐 멈춰 서더니 순식간에 언니를 낚아채 싣고 사라졌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소리 지를 새도 없었다.
이들에겐 방랑하면서 얻은 ‘예상치 못하게 헤어지면 반드시 헤어진 자리에서 머문다’는 원칙이 몸에 배어 있었다. 둘은 길 밖에 주저앉았다. 언니가 다시 온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이튿날 이른 새벽 쪽잠을 자던 은주 씨는 언니를 데리고 나타난 어머니를 발견했다. 저승사자를 보고 온 듯한 표정이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주 씨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했지만 입 밖 꺼낼 순 없었다. 세 모녀는 그날의 기억을 마음에 묻었다. 20년이 지난 뒤 은주 씨는 어머니와 당시를 회상했다. 어머니는 딸이 다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때 언니는 달리는 차에서 몹쓸 짓을 당하고 길에 버려졌어요. 굶주림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꽃제비 생활을 하며 체격도 뼈밖에 남지 않았고 생리도 시작하지 않았을 때였어요. 짐승들에게 걸린 거죠. 사탕과자를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중국에 온 첫날 천국과 지옥을 다 경험했습니다.”
다시 뭉친 세 모녀는 길을 따라가다 새로운 마을을 만났다. 유독 가까이 다가와 친절하게 말을 거는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은 세 모녀를 자신의 집에 데려가 소풍 갈 때도 반쪽씩 나눠 먹을 수밖에 없던 귀한 달걀을 그릇 가득히 삶아 주었다. 갈아입을 옷도 줬다. 고마워하는 어머니에게 이 여인이 설득했다.
“이렇게 돌아다녀 봐야 잡혀서 북송될 수밖에 없다. 중국인과 결혼해야 보호도 받고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내가 좋은 자리를 찾아 줄 테니 밖에 나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라.”
말을 들으니 옳은 소리였다. 어머니는 두 딸을 한참 쳐다보며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지나자 어머니보다 7세 많은 한족 남성이 찾아왔다. 세 모녀는 그를 따라나섰다. 자신들이 200위안에 팔렸다는 것은 1년 뒤에 알았다.
크게보기
지난해 3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한 살의 유서’를 함께 펴낸 세바스티앙 팔레티 프랑스 일간 피가로 서울 특파원과 만난 김은주 씨.
목록
다음글
[동아일보]인물동정
이전글
한경 [포토] 하나원, 기부자 명예의 전당 설치 2025.07.08 1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