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운명의 두 날 ⑪
증언자: 유영복
2000년 탈북, 2000년 한국 입국
편집: 윤영일 <지원팀 매니저>
삽화: 안충국 <탈북화가>
탈북 국군포로 유영복 님이 육필 수기를 시민연합에 기증해주셨다. 이 수기에는 북한에서의 힘들었던 삶과 여전히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의 송환이 속히 이뤄지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있다. 유영복 님은 이 수기를 「뉴스레터」에 실어 많은 회원 분에게 국군포로의 삶을 알리고 싶다고 전하셨다. 이에 유영복 님의 『운명의 두 날』이라는 책으로 출판된 바 있는 수기를 요약해서 연재한다.
■ 김일성의 사망
여름이 시작되던 7월 9일 북한 전지역, 산간마을에까지 중대 방송이 있으니 모두 빠짐없이 청취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혹시 김영삼 대통령이 방북한다는 보도인가, 나는 설레면서 방송을 들었다. 그러나 방송은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을 들려주었다. 김일성이 서거했다는 내용이었다. 북한 주민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8·15해방 후 오늘까지 북한에서는 오직 김일성만을 위대한 수령으로 숭배해왔다. 그는 백성들에게 반드시 살기 좋은 세상, 고깃국에 쌀밥을 먹으며, 기와집에서 살도록 해주겠다고 했는데 사망 소식을 들으니 왜 서러워하지 않겠는가. 그의 죽음은 내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렇게 되면 남한 대통령의 방북회담은 무산될 것이다. 아내도 죽고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실낱처럼 가져온 희망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북한의 여러 사람들이 아쉬워하고 애석한 눈물을 보였지만, 그 부류는 서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로부터 신임과 특혜를 받으며 지내던 계층들이 흘리는 눈물은, 그동안 받아온 사랑과 배려에 감사하며, 진정으로 슬퍼하는 눈물이었을 것이다. 반면 서민들이 흘리는 눈물은, 살아생전에 살기 좋은 세상을 마련해 주며 배곯지 않은 세상을 반드시 마련해 주겠다고 하던 그 약속을 지켜주지 못하고 너무도 힘든 시기에 갑자기 사망한 것에 대한 설움과 원망의 눈물이었다.
어쨌든 김일성의 급작스런 사망은 북한 주민들에게 커다란 불행이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사망한 이후 주민들의 처지는 더 나빠졌다. 그나마 조금씩 주던 식량공급도 차별공급이 극심해져 생활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해졌다.
김일성이 이룩하려던 세상은 그저 환상이었다. 내 삶을 통해 북한 사회의 허위와 부조리를 목격했다. 결과적으로 70세가 될 때까지 내가 치른 것은 굶주림과 통제뿐이었다. 감시와 차별 하에 하루도 기를 펴지 못하고 심중에 있는 참된 말도 못 해 보고 지냈다. 어쩔 수 없이 살았지만 너무도 어리석게 살아온 나의 생이 허무할 뿐이다.
■ 북한은 왜 못살게 되었을까?
북한은 왜 그렇게 못 살게 되었을까? 북한에서 생활하면서 북한 사람들도 같은 민족으로서 부지런하고 성실한데도 불구하고 만성 식량난과 굶주림으로 허우적거리는지 이유를 내 나름대로 정리 해 본 생각은 이렇다.
첫째는 국가의 많은 돈이 허례허식에 너무 많이 사용된다. 북한 전 지역, 천지가 김일성, 김정일 두 사람의 위상을 떠받드는데 막대한 자금을 투하해서 장식했다.
둘째는 필요 없는 산업 시설과 공장을 마구잡이로 너무 많이 지었다. 자력갱생, 자급자족한다는 구호 속에서 세워진 것들이니 취지 자체는 좋다. 그러나 그런 공장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나오는 것이 없다.
섯째는 김일성 주석사망 이후 김정일이 국방위원회 위원장 자리에 오르면서 내세운 선군정치였다. 김정일은 군부의 신임을 얻고 자신의 위상을 더 높이기 위해 국방에 모든 것을 투자하였다. 물론 국방건설을 중요시해왔지만, 김일성 사망 이후부터 더 강하게 요구했다.
그 밖에 필요한 외화를 벌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전체 인민들에게 의무적으로 외화벌이 과제를 내린다. 외화 과제를 수행하지 못한 사람은 비판받았다. 북한 사회에서 행해지는 정치적 비판사업은 사람을 거의 죽은 시체처럼 취급하여 뼛속까지 아프게 만들어 버린다.
북한 주민이 고통받고 힘들어하면 북한 당국은 자력갱생정신으로 해결하라 한다. ‘자력갱생’은 북한의 만병통치의 구호다.
■ 살아 있는 게 기적인 날들
나는 가까운 이웃들이 먹지 못해 시름시름 앓다 죽는 경우를 수없이 목격했다. 비참한 사연을 쓰자면 끝이 없다. 심지어 너무 배가 고파 인육을 먹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나는 한 끼 먹을거리가 없어 할 수 없이 가까운 곳에 있는 여동생 집에 찾아가 매부 되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던 적이 있는데, 매부가 얼마나 쌀쌀했던지, 처남은 이제 나이도 70이 다 되어 가니 살 만큼 살았는데, 왜 찾아와서 우리까지 힘들게 하냐고, 나 때문에 우리 젊은 사람까지 못살게 한다면서 다시는 오지 말라고 냉정하게 말했다.
또 한번은 합숙생활하던 아들이 집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내가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고통받는 것을 본 경석이 삼촌집에 가서 먹을 것을 얻어 오겠다고 했다. 그때 삼촌이 없어서 작은어머니에게 사정했지만, 그녀는 경석에게 “이 개자식 같은 놈아, 너 줄 것이 어디 있냐, 당장 가라!”며 문밖으로 내쫓겼다.
참으로 그때 나는 죽지 못해 연명한 상태였다. 마을에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어 나갔는데, 내가 살아남은 것은 정말 기적일 수밖에 없다. 집이 불타고 아내마저 잃은 후 하루하루를 비참하게 살고 있었기에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고도 남았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세상 속에서도, 인색하고 몰인정하며 이기적인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먼 곳에 있는 친인척 형제들보다 이웃 사람들이 나의 끼니를 걱정해 주었다. 어쨌든 이웃분들의 도움은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 참전자들에 대한 차별
국군포로로 건설대 생활을 함께했던 동료 중 많은 사람이 온갖 우여곡절을 거치며 힘들게 살았다. 당원이 되어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노예와 같은 삶을 살면서 평생 각종 사고와 질병에 몸을 혹사당했다.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은 행운아였다. 차별과 통제에 저항하거나 사소한 비판 한 마디로 인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사람, 모진 매를 견디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 죽은 사람, 소리소문없이 처형된 사람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반면, 6·25참전 인민군들에 대해서는 1990년대에 전국참전노병대회를 개최한 이후에 그들 모두에게 참전훈장을 수여하고, 노후 참전연금을 지급했다. 사회적으로 참전 노병들을 존경하고, 내세우는 사업을 한다. 해 매다 7월 27일이 되면, 각 지역별 단위로 전승기념 행사도 개최하고 식사도 제공한다. 7월 27일은 김일성 장군이 미제국주의를 물리친 제2의 전승기념일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때문에 6월 25일이 반미 투쟁의 날이라 한다면, 7월 27일은 그보다 중한 전승기념일이라 하여 명절같이 기념하고 있다.
남한이 인도주의 차원에서 북한 장기수 64명을 북한으로 보냈다. 그들 역시 북한에서는 대환영을 하면서 최고의 훈장을 수여하였고 돌아온 그들은 청년들과 인민군 병사들의 정서교양과 사상교양의 생동한 표본으로 이용했다. 우리 정부의 인도주의 시책에 따라 돌아간 것임에도 마치 본인들의 노력으로 돌아간 것처럼 내세우고 있으니 분노할 일이다.
모든 것은 상호주의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왜 우리 정부는 ‘국군포로’는 한 명도 데려오지 않고 일방적으로 장기수를 돌려보냈는지, 억류되어 모진 고통과 차별받아 온 전쟁포로 송환을 강력하게 요구하지 않는지에 대해 한국 정부에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