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인권실상

[증언] [증언]운명의이 두 날 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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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 유영복

2000년 탈북, 2000년 한국 입국

편집: 윤영일 <지원팀 매니저>

삽화: 안충국 <탈북화가>

탈북 국군포로 유영복 님이 육필 수기를 시민연합에 기증해주셨다. 이 수기에는 북한에서의 힘들었던 삶과 여전히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의 송환이 속히 이뤄지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있다. 유영복 님은 이 수기를 「뉴스레터」에 실어 많은 회원 분에게 국군포로의 삶을 알리고 싶다고 전하셨다. 이에 유영복 님의 『운명의 두 날』이라는 책으로 출판된 바 있는 수기를 요약해서 연재한다.

■ 평양에 온 김대중 대통령

살다 보면 꿈같은 날들은 반드시 있다. 국군포로가 되어 북한에 끌려와 생각지도 못한 어머니와 동생들을 만났듯이,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한 것 또한 꿈도 꾸지 못한 일이었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던 5월 초에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남한의 김대중 대통령이 멀지 않아 북한에 찾아온다는 소문이었다.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삼회담이 무산되었을 때 얼마나 안타까웠던가. 남북 간에 다시 화해 무드가 조성되는 것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얼마 후 북한 당국은 정식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방북한다는 보도를 했다. 동시에 주민들에게 여러 가지 정치교양 사업과 강연 사업을 하기 시작했다. 교양내용의 중심은 이번에 남한 대통령이 온다고 해서 어떤 환상이나 기대를 하지 말라는 것과 더욱 각성하고 경각심을 갖고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 도착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나는 그 장면을 꼭 보고 싶어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텔레비전이 있는 집을 찾아갔다. 집안데 들어서니 벌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 들어갈 곳이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 내외분이 비행기에서 내려 김정일 위원장과 뜨겁게 악수하는 장면이 보였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참으로 감격적인 장면이었다.

남북 간에 수많은 문제가 있을 것이지만, 국군포로 문제도 잊지 않고 거론된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순간 모든 국군포로 출신자들의 마음은 하나였을 것이다. 나도 이제는 외롭고 고달픈 이곳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얼마 후 남북615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디에도 군군포로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이제 내 나이 만 70세 한 많은 세상살이 살 만치 산 나이다. 이제 오직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죽기 전에 남한 땅을 한번 다시 밟아 보고 여생을 마치는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방북한 후에 나는 남한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더 이상 이 형벌의 땅에서 지긋지긋한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다.

■ 목숨을 건 결단

김대중 대통령이 방북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고 나자 허무함이 더욱 커졌다. 국군포로 송환에 대한 기대감이 컸던지 실망감 또한 너무 컸다.

이제 나도 결단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여기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위험하고 막연하지만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날 것인가?

나는 내 인생의 마지막 갈림길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중국을 오가며 보따리장수를 하는 딸아이 친구 영성이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국군포로 출신이며,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남한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향을 비쳤다. 그러자 영성이도 자세한 이야기를 꺼냈다.

더 이상 망설이고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영성이에게 나의 결심을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에서의 삶은 죽은 삶이다. 마지막 남은 삶이나마 자유를 느끼며 살고 싶다고.

“가다가 실패하면 바로 죽음이에요. 아시지요?”

“안다. 이미 나는 죽었다. 여기만 벗어날 수 있다면 내 목숨을 건다.”

“나는 무조건 간다. 너에게 다 맡기마.”

“알았어요. 아저씨, 그럼 내일 당장 떠나도록 해요.”

그녀가 돌아가자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나왔다. 나는 방금 목숨을 건 위험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이제 하룻밤만 지나면 나의 운명은 다시 바뀐다. 그리운 남한으로 가게 되거나, 총탄을 맞고 싸늘한 시체가 될 것이다.

70년 인생에서 지난 과거와 경험에서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허무함을 느낀다. 목숨을 걸고 자신의 고향과 가족들이 있는 품으로 돌아오고 싶어하는 그의 마지막 길을 표현하려고 했다.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생을 죽었다 표현하면서 새로운 빛이 있는 길에 도전한다. 그림은 빛을 향한 발걸음을 표현하고 싶었다._작가 안충국

■ 탈출 1

동암역에서 영성이와 함께 하는 일행들을 만나 이동을 시작했고, 며칠에 걸쳐 무사히 단천에 도착했다.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여행증이 있어야 청진 쪽으로 가는 차표도 살 수 있고, 검열 단속도 통과가 되는데 증명서는 영성이 혼자만 가지고 있었다.

영성이는 두세 명의 안전원들이 피곤하게 앉아서 청진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접근해서 온갖 애교와 봉사적 언어로 그들과 가까워졌다. 그들이 몹시 배고파한다는 심정을 파악하고 가까운 시장에 가서 재빨리 시원한 맥주와 푸짐한 음식을 사가지고 와서, 차가 언제 올지 모르니 지금 식사나 하자며 안전원들을 초대했다. 그리고 틈을 보아 자연스럽게 자신의 간절한 용건을 제기했다.

“급히 떠나다 보니 아버지와 남편 여행증을 해결하지 못했어요. 차표는 뒷거래로 구했는데, 증명서 검열이 문제네요.

좀 도와주시면 은혜 잊지 않겠어요.”

안전원들은 청진행 개찰구까지 동행했다고, 자주 증명서 검열을 당하기 쉬우니 불편하더라도 화물칸에 타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청진까지도 무사히 왔고, 무산행을 타는 문제도 뒷거래로 차표를 구하고, 비숫한 수법으로 차엘 올랐다. 접경지대인 무산에서는 증명서 검열이 심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영성은 무산 못미처에 있는 작은 역전에서 내려서 한참을 걷다가 달려가는 트럭을 세워 술과 고급담배를 주며 사정했다. 덕분에 무산읍까지 안전하게 도착 할 수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 삼봉의 접경마을에 사는 김씨 집이었다.

늙은 나는 여러 단속 초소에서 검열 없이 지날 수 있었는데 젊은 남자는 초소를 지나가는 것이 여의치가 않았다. 몇 번이고 단속에 걸려 위험한 순간을 당했다.

두만강 접경 마을 사람들은 어른이나 아이들까지도 감시원이나 다름없이 낯선 사람만 만나면 행처를 따지고 정체를 확인하려 들었다.

5명 중에 둘은 자신 없다고 우리와 헤어지고 남은 우리 셋은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는 심정으로 태연하면서도 은밀하게 걸어갔다. 저만치 그림자만 보여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행히 저녁식사 무렵이어선지 사람이 많이 보이지는 않았다. 날이 어두워질 때 우리는 김씨 집 앞에 도착했다. 20일에 동암을 떠나 우리가 이 마을에 도착한 것은 일주일이 지난 27일이었다. 북한에서는 제2의 전승기념일이 있는 날이었다. 우리는 노인에게 운명을 맡기고 한구석에 움츠려 있었다.

그는 수시로 밖에 나가서 두만강 둑길을 걸으며 경비원들의 상황을 살펴보는 듯 했다. 노인은 오랜 경험을 통해서 경비원들이 어느 때 가장 피곤해 하며, 초소 막에 언제 들어가며, 얼마 정도 있다가 나오는지를 거의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초조한 심정으로 그를 기다렸다. 1분이 하루처럼 긴 시간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새벽 3시가 되었다. 노인이 조용히 와서는 나가자고 말했다. 우리는 노인의 뒤를 따라 옥수수밭 속으로 해서 한걸음 한걸음 강가로 다가갔다. 최대한 소리를 죽였지만 가볍게 바스락거리는 소리에조차 가슴이 마구 떨렸다. 강변까지 캄캄한 밤길을 한참 가다 보니 온몸에 땀이 흐르고 팔다리가 저려왔다. 이윽고 강둑 너머 물가 옆에 도착했다. 우리 바로 앞에 두만강 강물이 세차게 출렁이고 있었다. 어둠 속으로 저 멀리 중국 땅이 아스라이 가물거렸다.

드디어 마지막 관문이다. 어둠 속에서 묵묵히 흘러가는 강을 보고 있자니 불안한 속에서도 온갖 감회가 한순간에 스쳐 갔다. 노인은 여기서 직선 방향으로 건너가라며 손짓했다. 물살이 세기 때문에 도저히 직선방향으로 건널 수 없었다. 한걸음 한걸음마다 현기증이 일었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세찬 물결과 싸워 간신히 강을 건넜다.

아직 갈 길이 남아 있지만, 그 동안의 설움과 시련 많던 북한 땅과는 영원히 작별했다. 수많은 미련과 가슴 아픈 추억이 생생하게 남이 있는 곳이었다.

“이제 됐어요! 여기가 중국 땅이에요!”

영성이가 힘주어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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