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인권실상

[증언] [증언]엄마를 구하기 위해 다시 압록강을 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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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저는 북한 양강도 혜산시에서 온 김강우라고 합니다.

오늘 짧지만 파란만장했던 저의 지난날을 간단하게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1995년 평범한 한 노동자의 가정에서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리 풍족하진 않았지만 화목한 부모님의 사랑 속에 저는 행복하게 자랄 수 있었습니다.

제가 15살 되던 2009년 북한에서 화폐개혁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저의 행복했던 유년 시절이 끝날 줄을 그때는 미처 몰랐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돈을 신화폐로 바꾸고 3일 만에 다시 치솟은 물가로 인해 집안 형편은 걷잡을 수 없이 어려워졌습니다. 난생처음 배고픔이 뭔지 알게 되었고 산에 나무하러 가야 해서 학교를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일 절망스러웠던 것은 이 불행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줄기의 빛도 보이지 않는 생활이 2년 정도 지속되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중국에 있는 먼 친척을 찾아 탈북하게 되었습니다. 평양에 있는 친척들에게 도움을 구하려 서너 번 정도 다녀왔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기에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가족을 살리려고 탈북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중국으로 떠난 지 3개월 만에 보위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버지가 중국에서 붙잡혀 북송되어 함경북도 청진에 있는 보위부 집결소라는 감옥에 있다고 말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고향으로 이송할 수 있게 가진 돈을 다 털어 뇌물로 썼습니다. 11월 말의 그 추운 날씨에 청진에서 혜산으로 이송되던 중 아버지는 기차 칸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17살의 저는 삼촌과 함께 수백 리 길을 걸어가 아버지를 언 땅에 관도 없이 묻어주었습니다. 매 맞아 얼굴도 알아볼 수 없는 아버지의 차디찬 시신을 보며 저는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북한 땅에 조금의 미련도 남지 않았습니다. 정치범의 아들로 군대에 갈 수도 없고, 돈이 없어 대학에 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저에게 남은 길은 노예처럼 살거나 죽더라도 빛을 찾아 떠나는 길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남한에 친척 한 명 없는 저에게 탈북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20살 때 중국에 몰래 가서 몇 개월 정도 일해 본 경험밖에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남한이라는 목적지를 정했기에 가는 길을 몰라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갈 수 있다고 저는 저 자신을 달래주며 22살 때 친구 한 명과 함께 탈북하였습니다.

나서 자란 고향을 떠나며 살아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도 다졌습니다.

저는 친구와 함께 기독교 선교회의 도움을 받아 4개월 정도 중국에 체류하다 라오스, 태국을 거쳐 대한민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태국에 있는 난민수용소와 국정원, 하나원 등 시설을 거치며 일 년이라는 시간을 보냈지만 아쉽지는 않았습니다. 일 년이라는 시간을 바치고 새 삶을 얻었기에 새로운 생활에 만족했습니다. 처음 3개월 정도는 여명학교라는 대안학교 고3에 입학하여 대학 진학을 목표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항상 저에겐 배우고 싶었던 열망이 있었기에 남한에 오자마자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뉴질랜드에 6개월 정도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고향에 남겨진 어머니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남한에서 대학을 나오고 취업하여 성공이라는 것을 한 다음 어머니를 모셔 올 생각이었는데 그 생각이 잘못됐음을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공부할 동안 어머니가 살아는 계실지에 대한 불안으로 저는 학업을 뒤로 미루고 다시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궂은일 마른 일 안 가리고 열심히 돈을 모았습니다. 건설 현장 막노동부터 KT 매장에서 핸드폰 판매사까지 다양한 일을 경험 해보며 돈을 모았고 브로커를 찾았습니다. 몇 개월에 한 번씩은 어머니에게 돈도 보내 드렸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친 2019년 5월 11일 저는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도강하는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덜 무서워할 수 있게 압록강에 마중을 나갈 생각이었습니다. 한시라도 더 빨리 어머니를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강을 넘겨주기로 한 북한 브로커의 계속되는 약속 불이행과 제가 고용한 조선족 브로커들의 돈 요구에 저는 난관에 빠졌습니다. 결국 조선족 브로커들은 연길로 돌아가고 저 혼자 압록강 건너 중국 장백현에 남았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고향을 지척에서 바라보며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무서워 포기하시려 하는 어머니와 돌아오고 나중에 다시 기회를 잡자는 친구들의 조언, 포기할 수 없는 저의 고집 사이에서 저는 용기를 내기로 했습니다. 다시 북한에 들어가는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년 이상의 실형을 받을 수도 있단 걸 알았기에 쉬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먼저 국경경비대에게 발각되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저를 낳아주고 키워 준 어머니가 지옥 같은 곳에서 고생하고 계시는데 두렵다고 망설이기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압록강을 다시 건넜고 군인에게 발각 됐었지만 몸싸움 끝에 탈출하여 3년 만에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23일이라는 시간을 북한에서 쫓겨 다니면서 결과적으로 어머니를 무사히 남한에 모셔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법을 어긴 데 대한 처벌은 달게 받았고 브로커에게 진 탈북 비용도 일 년동안 열심히 일해서 다 갚았습니다.

저의 재입북 이야기를 유튜브에 업로드했는데 그걸 보시고 한 고마운 분께서 저를 도와주시기로 하셔서 지금은 국민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공부하며 새로운 꿈을 꾸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빌어 저에게 공부할 수 있게 도움을 주신 조O진 회장님께 다시 감사하다는 인사를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저처럼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 많은 청년들에게 희망을 잃지 말고,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간 꼭 성공할 수 있다고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다시 기회가 생기면 더 좋은 소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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